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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고대국가 부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고대국가인 옥저, 동예, 삼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들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보면서 한반도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1. 옥저의 역사와 문화
옥저는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후 285년까지 함경도부터 연변 조선족 자치주 남쪽, 연해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옥저에는 동옥저, 북옥저, 남옥저 이렇게 세 옥저가 존재했습니다. 동옥저는 함경도에 존재하였고, 동예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북옥저는 북간도와 연해주 남부 지방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남옥저와 붙어 있었으나, 후에 떨어졌고, 동옥저와 붙어 있었던 적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옥저는 함경남도와 강원도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옥저는 왕의 호칭을 칭하는 연맹국까까지 발전하지는 못하고, 후, 삼로, 읍군이 통치하는 군장국가에 머물렀습니다. 옥저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 전통행사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고, 결국 고구려에 복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옥저는 소금과 어물 등 해산물이 풍부하여서 매년 소금과 어물을 고구려에 바쳤습니다.
옥저인 들은 그들의 영토에서 나오는 모피들을 중국인들한테 파는 대가로 중국인들이 주는 화폐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옥저의 영토였던 함경도 일대에서 발굴되는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전국 시대 위나라의 동전이나 전한의 오수전 같은 중국 화폐들이 나옵니다. 옥저인들이 중국 화폐들을 들여와서 상거래에 사용했으리라고 추정됩니다. 또한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화폐들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옥저의 독특한 풍습으로 민며느리제와 골장제가 있습니다. 먼저 민며느리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이는 매매혼으로 데릴사위제와는 반대로, 집안끼리 자녀들의 결혼을 약속하고, 10세쯤 되었을 때, 여자가 결혼을 약속한 남자의 집으로 가서 살게 되며, 추후 혼기가 찼을 때, 다시 집으로 돌려보낸 뒤 결혼하는 제도입니다. 일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혼수를 마련할 비용이 없을 때, 상대 집에 혼수 비용 대신 딸을 일찍 보내게 됐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골장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골장제는 시신을 산에 안치해 두었다가 뼈를 추슬러가는 제도입니다.
옥저의 멸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동옥저는 서기 56년에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북옥저는 기원전 28년 고구려 동명성왕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서기 244년 조위의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제11대 동천왕이 패배한 이후 북옥저로 도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북옥저도 관구검의 침입을 받았고 285년 고구려 제13대 서천왕에게 멸망이 아닌 귀속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남옥저는 여전히 논란이 많으나 2세기에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가 이후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에 편입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중론입니다. 또 다른 기록으로는 남옥저가 서기 260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2. 동예의 역사와 문화
동예는 기원전 82년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오늘날의 함경남도 남부 원산 부근에서 강원도 강릉시, 경상북도 영덕군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지역에 넓게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동예는 옥저와 마찬가지로 왕과 대군장이 없는 후, 삼로, 읍군이 통치하는 군장국가였습니다. 동예는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이 발달했다고 하였고, 동해안에 위치하여 해안가 있어서, 해산물이 풍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압박이 항상 있었습니다. 동예는 박달나무로 만든 활인 단궁, 키 작은 조랑말인 과하마, 물범 가죽인 반어피 등의 특산물이 있습니다. 또한 옥저는 제천행사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동예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습니다. 무천은 10월에 진행되었습니다. 옥저에 민며느리제와 골장제가 있었다면, 동예에는 책화와 족외혼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동예는 매우 폐쇄적인 씨족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어 이러한 풍습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책화란 다른 부족이 영역을 침범할 시 노비, 소, 말 등의 재물로 변상해야 하는 풍습입니다. 족외혼이란 다른 부족이 아닌 같은 부족끼리는 혼인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예는 옥저와 달리 멸망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옥저를 복속시킨 후에 동예를 공격하였고, 이에 동예가 멸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의견으로는 왕권이 모아지지 않는 군장국가여서 내부 분열이나 혼란 등으로 멸망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 삼한의 역사와 문화
삼한은 연맹왕국으로 고대 한반도의 남부에 위치한 한인들의 나라들을 말합니다. 기원전 194년에 고조선에서 쫓겨난 준왕이 새로 자리 잡아 왕에 오른 한, 혹은 소국 연맹체 진국인 고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서 형성된 소국들의 연맹체인 마한, 진한, 변한 등이 탄생하면서 삼한이라는 칭하게 되었습니다. 삼한이라 칭하기는 하나, 굉장히 작은 소국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협력하기도 하고 서로 분쟁하기도 하면서 각자의 세력을 넓히고자 하였습니다. 마한은 54개, 진한과 변한은 12개 소국으로 되어있습니다. 이중 마한은 목지국이라 불리고 목지국의 왕을 진왕이라고 칭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마한의 세력이 가장 우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한은 백제의 남하로 인해 병합되고, 변한은 후에 가야로 발전했으며, 진한은 신라로 흡수되었다고 추정됩니다.
삼한은 제정이 분리되어 있는 사회였습니다. 마을의 중심에 소도를 세웠습니다. 소도란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기는 곳을 뜻합니다. 이곳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잡지를 못하는 풍습이 있어 사람들이 도둑질을 즐겨했다고 합니다. 농사는 5월에 씨를 뿌려 10월에 수확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때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들은 초가지붕의 반움집과 귀틀집을 지어 생활하였고, 새의 깃털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 풍습이 있었습니다.
삼한 국가들인 마한, 진한, 변한은 독특한 풍습을 가지며 발전해 왔습니다. 이러한 풍습들은 오늘날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발전에 기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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